1.



6시 땡 치자마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목욕을 했다. 때도 빡빡 밀고 때깔 좋은 모습으로 아침밥을 먹고, 평상시 자주 가던 페이스북 그룹에 연재하던 정보글을 마무리 짓고 바로 출발했다. 띠롱띠롱 시끄럽게도 울리는 카톡소리와 달리 정말 조용했던 차 안. 나름 걱정하셨던 모양이었다. 일찍 도착해서 이른 점심을 먹고, Mango six에서 스무디를 하나씩 물고 가족들과 조용히 의자에 앉아있던 기억이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도착하자마자 꼭 연락하라는 당부를 30번 쯤 듣고 나서야 나는 혼자서 그 입구로 들어갔다. 안녕! 고마워! 잘 갔다올게! 태연한 말투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렇게 가족들을 보냈다. 혼자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멍하니 면세점을 돌아다녔다. 우리나라에서 싼 값에 담배를 사가면 그렇게 잘 팔린다던데.. 한참을 고민하다 귀찮을 것 같아 포기하고, 레모네이드를 하나 사먹었다. 그리고 정말. 정말 마지막 전화를 했다. 다이어리에 적어놨던 것과 상관없이 당장 생각나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했다. 나에게 무한 용기를 주는 사람들 반, 채찍질 하는 사람들 반이었다. 그 중 한 명에겐 전화하다 아쉬워 조금만 있다 뱅기 타기 직전에 전화할게. 라고 했는데 '아냐 그냥 하지마'라는 쿨한 인사도 들었다. 나한텐 이딴식으로 말하고 여자친구한텐 하트뿅뿅 날리면서 엄청 애교부리겠지.. 사실 말투만 원래 그런 사람이라 별로 화나거나 삐질 건 없었다. 그냥 전화를 막상 하기 시작하자 나는 엄청 예민하고, 흥분되어 있었다. 



나 출국한다고, 모두에게 전화해서 소리지르고 싶었다. 얼마 전만 해도 이거 뭐 별거 아니라고 하고 한 달 전부터 출국 소식을 알리고 다녔고, 마지막 일주일은 집에서 혼자 조용히 지내와놓고 이제와서 그러고 있었다. 통화를 위한 1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비행기 안에 들어가 자리에 앉자 신기하게도 모든 감정이 가라 앉아 다시 덤덤한 감정상태로, 아무 실감이 나지 않던 전날처럼 돌아갔다. 11시간 비행을 위해 준비해온 영화 두편을 보고, 비행 시간동안 잠들어서 시차적응을 빨리 하기 위해 와인 4잔을 연거푸 마셨는데 잠을 잘 수 없었다. 영어공부를 하려다 10분만에 포기하고, 5시간동안 다이어리에 일기만 빡빡하게 채워갔다.




2.

'아가씨, 한국사람이지? 나 좀 도와줘'



미국에 왔다. 미국에 왔다. 인터넷과 글로만 배우던 샌프란시스코의 아담한 공항 한복판을 내가 걷고 있었다. 무거운 이민가방과 더 무거운 여행용 백팩을 짊어지고 나오면서 드디어 실감이 조금씩 나려고 하는 순간 어떤 한국인이 갑자기 나에게 BART 티켓 끊는 법을 알려달라고 하며 다가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처음 대화를 한 건 결국 한국사람이었다. 다짜고짜 도와달라고 손을 잡아끄는 아주머니를 보며 '잘 몰라요'하고 그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2분 전에 흑언니한테 티켓을 구매했던지라 차근차근 설명해드렸다. 미국이지만, 당연하게도 한국사람이 정말 많은 곳이었다. 쿨하게 인정하면 되는 문제였는데..ㅋㅋ 그러나 이건 앞으로 내가 만나게 될 수 많은 한국인들에 대한 서막에 그치지 않았다.



주변도시 이동의 핵심인 BART. 샌프란시스코 공항과 바로 연결되어있어 여행객이나 사는 사람들이나 공항에서 대부분 BART를 통해 도시로 이동한다. 우리나라 지하철에 비해 굉장히 소박하고 작다. 의자는 마주보는 의자, 한쪽 방향만 보는 의자, 옆으로 앉는 의자 등 다양하게 배치되어 있어 일행 인원과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창문이 뚫려있어 경치구경하기 좋겠다 했는데, 딱히 볼만 한 경치는 없다. 미국건물, 미국태양, 미국구름, 미국자연은 볼 수 있다. 




BART의 내부모습




BART (Bay Area Rapid Transit)

Bay Area, SF를 포함해 부근 도시까지 연결해주는 기차.

아래 주소를 통해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다.

http://www.bart.gov/stations/index.aspx









posted by 노닝

출국 D-1

어학연수 2013. 5. 19. 01:26

D-1.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출국 전날이 왔다. 두번 세번을 더 확인하고, 체크리스트도 두 번이나 체크했고, 당장 가서 묶게 될 호스텔 예약도 확인했다. 정말 떠나는 것이다. 아무도 없고, 말도 안통하는 곳으로. 덜덜 떨릴 줄 알았던 것과 달리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고, 내일도 별 다를 일 없을 것만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 엄마가 해놓은 계란찜을 맛나게 먹고, 뒹굴뒹굴 거리며 영화를 보고, 공부하고, 샌프란시스코 구경하고, 저녁에 산책 잠깐 하다 8시쯤에 돌아오면 내가 먹고 싶었던 것들을 또 잔뜩 펼쳐놓아 가족들과 맛있게 먹겠지. 



흥분되고 기대되지 않았으며, 긴장되고 초조하지도 않았던 그런 태연한 마음이었음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꼴딱 밤을 새버린 나를 회상해 보면, 내일 출국이라고 말해주는 모든 주변 사물의 힌트들을 그저 거부했던 것 같다. 엄마가 주었던 편지와 일주일 치 생활비. 친구들의 연락. 내 침대 옆에 항상 있는 허벅지까지 오는 살벌하게 무거운 이민가방. 텅 비어있는 옷장. 다이어리에 써있는 D-1. 풀충전된 카메라. 묘하게 무거웠던 마지막 저녁식사까지. 그렇게 애써 무시해 가며 긴긴 밤을 보냈다.

posted by 노닝


미국에 가기 위한 모든 준비는 미국비자가 80%이상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일정을 굉장히 빡빡하게 잡아가면서 비자를 얻어냈고,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어학원에 등록신청을 완료했을 때가 아마 4월 중순이었을 것이다. 회사를 마무리하고 5월달이 되서야 내가 뒤늦게 시작했던 것은 사실 남들이 반년 정도 전에 미리 다 하는 일이었다.  




1. '와~ 좋겠다. 미국은 언제 가는데? 3달뒤?' '아니 10일 뒤..'



그 당시 가장 자주 연락을 하던 지인들부터 4월 중순 모든 업무가 끝마치고 난 후 천천히 이야기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더이상 어학연수가 대단한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 또래나이에서 비교적 흔히 일어나며, 각종 소셜채널과 카톡 덕분에 해외에서 국내로 연락하는 건 더이상 문제가 아니었기에 그저 반년에서 1년정도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만 아쉬운 일이라고 느껴왔다. 그렇기에 꼭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의 리스트를 정리하고, 몇개의 집단으로 요약한 후 나름대로 송별회 약속을 잡은 다음에 한창 무르익은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는 방식으로 5월을 보냈다. 출국 준비 다이어리에는 내 인맥 리스트가 비교적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24년간의 인생의 가치가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고마운 사람들 이었다. 대학교에 들어간 2009년부터 지금까지 너무나도 정신없에 보낸 턱에 모든 사람들에게 많은 애정을 쏟아주지 못했었음에도, 덤덤할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누군가는 기겁을 했고, 화를 내기도 했으며 자신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은 점에 대해 서운해 하기도 하는 둥 다양한 감정표현을 내게 내비쳤다. 소중함을 다시금 느끼게 된 사람들도 있었고, 이 사람에겐 조금 더 일찍 말해줄 걸 하는 생각을 들게 한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미국에서 별짓을 다 하며 살게 된 것도 이 때 받은 새로운 에너지 덕은 아니었을까 싶다.



계획했던 송별회들이 모두 끝나고, 페이스북의 모든 지인들에게도 마침내 내 출국 사실을 공개했다. 

그때가 출국 일주일 전이었다.







2. 7일간의 시간들, 그리고.



2012년 한국에서의 마지막 일주일은 집에서 조용히 보냈다. 짐은 2주전부터 미리 싸놓은지 오래였고, 개인사정으로 만나지 못했던 몇 지인들 중 꼭 만나달라며 사정사정 하는 애들, 또는 동네 친구들만 조심스럽게 만났다. 집에선 쉬면서 틈틈히 공부를 했다. (그때 공부해 놓은 Grammar In Use는 미국에 가서 엄청난 빛을 발하게 되었다) 



수업 시작일은 6/4였고, 내 출국일은 5월 29일이었다. 중고 전자사전을 구입했고, 샌프란시스코에 대한 정보를 계속해서 누적해갔다. 거의 일주일정도 되는 시간을 앞당긴 이유는 시차 및 환경 적응, 여행.. 뭐 다양한 이유였다. 공부에 방해되는 행동은 일주일전에 모두 끝내고 싶기도 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그 일주일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여행가이드북을 샀고, 일주일동안 꼭 가봐야 하는 곳에 대해 미리 지도를 인쇄하고, 설레이고 불안한 마음은 매일 밤 잠들기 직전에 다이어리에 꾸역꾸역 집어넣고 있었다. 




동대문 시장의 명물 씨앗호떡




4일 전에는 오랫만에 혼자 밖으로 나와 동대문 시장에 들렸다. 미국에서 만날 사람들을 위한 기념품을 사야 한다, 혹은 살 필요가 없다에 대한 논란은 어학연수를 준비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제법 많이 회자되는 소소한 주제 중 하나인데.. 정말 못생긴 열쇠고리만 싸게 대량으로 파는 가게들중에서 고민하다 결국 정말 소중한 사람 2명을 위한 제법 괜찮은 기념품 2개를 샀다. 정말 아끼다 줘야지 하고 간직하던 이 선물은 미국 도착 후 첫 달이자 단 한 달 머문 홈스테이 노부부에게 모두 줘버리고 만다. 그때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다룰 예정.







그리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필름카메라를 수리받기 위해 보고사에 들렸다. 필름 끼우는 부분이 헐렁해졌는지 자꾸 빠지길래 왔는데 별문제 아니라며 끄적거리시더니 5분만에 고쳐 주셨고, 렌즈 세척에 건전지 2개도 무료로 주셨다. 2시간을 기다린 보람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너무 순식간에 끝내셔서 허무할 정도였다. 지금도 잘 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posted by 노닝

1. '너, 미국에 가지 않을래?'



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공부, 연극동아리, 마사회 · 재택 아르바이트 및 기타 잡다한 일에 오지랖 넓게 참여하며 대학생활 3/4을 말 그대로 하얗게 불 태운 후, 휴학을 하고 영어학원비를 벌기 위해 강남 모 광고회사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지 두 달 째 되던 때였다. 2012년 2월. 물론 어학연수는 이제 더이상 절대적으로 신기한 존재가 되진 않았다, 특히나 내 나이때가 가장 적기라 생각한 친구들이 떠난다며 비행기 티켓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리는 친구들이 한 둘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나? 내가? 이렇게 갑자기 그게 되는거야? 앞으로 엄청나게 어깨에 짊어지게 될 금액에 대한 부담감에 앞서 첫째로 들었던 생각은 '왜?'였다.



감사합니다. 저 가겠습니다. 말이 나오자 마자 덥썩 잡아 물긴 했으나 그 때가 2월 말이었고, 예정된 출국일은 6월 초였다. 3달 남짓 밖에 시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내 나이 24살. 영어? ㄴㄴ, 토익 · 토플 점수? ㄴㄴ, 미국 내 인맥? 전무. 정말 깔끔하게 어리버리였다. 그 당시 내 영어가 어느정도 였냐면 'She goes to school.'과 'She's gone to school.'과 'She's going to school.'의 차이점을 정확히 모르고 있었을 정도였다. (대학은 어떻게 간 걸까..) 여행은 가족들과 다닌 걸 제외하면 내일로여행 1번이 유일한 경력, 그나마 친구들과 다같이 간 지라 혼자 어딜 돌아다닌 경력이 전혀 없었다. 급하게 Grammar In Use를 구해 깨작깨작 채우기 시작했고, 어쨋든 정신 없지만 확실히 문제는 이게 다 인 줄 알았다. 





2. 이것도, 저것도, 그 것 까지 혹시 모르니 다 가져오세요. 미국이잖아요.



미국 비자를 발급하는 건 다른 나라보다 좀 더 복잡하고 어렵다. 사실 한 마디로 '우리집은 미국에서 돈 쓸 정도로 여유가 있고 나는 나름 한국에서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잘 살 던 한국 버리고 굳이 미국에서 눌러 앉을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를 증명하기 위한 과정이다. 일단 세금 증명서를 가져와 보라는 에이전시 말에 아무 생각없이 끊어갔던 세금 증명서를 본 내 담당자는 본격적으로 나를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우리집은 아버지가 오랜 고생 끝에 일궈낸 사업이 성공적으로 시작을 알린 상태였기 때문에 당연히 그 작년 세금납부 현황을 알려주는 세금 증명서에는 그걸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었다. 



덕분에 I-20뿐만 아니라 온갖 자료를 빼곡하게 챙겨야 했다. 정신없는 한 달이 시작된 것이다. 에이전시에 들릴 때마다 자료가 까이고, 요구사항은 늘어났고, 통장잔액내용 증명서에 내 통장 안에 수천만원이 들어 한 것을 인증하고 나서야 미국대사관에 예약을 할 수 있었다. 예상 질문에 대한 영어답변도 생각했고, 뒤로 갈 수록 거절당하는 사례가 많다는 소문 때문에 입장시간 45분 전에 들려 한참을 기다렸다가 들어가 세번째로 인터뷰에 응했다. 기다리는 도중에는 어떤 아줌마가 오시더니 심심하셨는지 자신이 여행을 정말 자주 간다는 얘기를 나에게 뜬금없이 하기 시작했다. 이번 비행기도 아시아나 마일리지로 가는 거라고, 이 정도로 많이 다녔다고 엄청 자랑 하시길래 '저도 마일리지로 가는 거에요' 라고 하니까 '아.. 그래?' 하시더니 자리를 옮기셨다. 이 때 이게 정말 별게 아니었구나 하고 맘을 놓았어야 했는데! 



뭐 결론 적으로는 한국어 통역사분이 계셨고, 내 자료는 그렇게 까지 궁금하지도 않았는지 반 정도 보시더니 내가 인터뷰를 시작 한 지 2분만에 통과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약간 빡치네, 그렇게 까지 준비할 필요는 없었는데.. 이 미국 비자 인터뷰 때문에 출발하는 비행기 뿐만 아니라 돌아오는 비행기 까지 미리 구매를 했었는데, 그걸 보지도 않으셨다! 게다가 이게 나중에 미국에서 집에 돌아 올 때 즈음에 골머리를 무척이나 썩게 만들었다. 그 얘기는 나중에!

posted by 노닝

블로그를 다시 시작하기 까지

일상 2013. 1. 22. 14:56

중학교 3학년때 네이버 블로그를 처음 접했을 때 그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 생각, 사고방식, 이야기, 때때로 중학생 다운 직설적이고 오글거리는 포스트 하나하나에도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고 내 글을 퍼가곤 했으니. 몇년 전 '블로그를 다시 해보자!' 라고 마음을 먹고 내 블로그 계정을 4년만에 다시 찾아갔던 적이 있는데, 내 상상과는 달리 말도 안되는 글들이 적혀 있었다. 담배를 피는 사람은 의존적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가까이 해선 안된다 (물론 중학교때 이런 말투로 글을 쓰진 않았다) 부터 시작해서 사랑에 대한 심난한 고찰, 그때는 누구나 한번쯤 분노하는 대한민국의 교육방침, 오글거리는 100문100답, 가족 문제까지. 어휴.. 누가 볼까 무서워 300개가 육박하는 그 글들을 미련없이 싹! 다 지워버렸다. 무슨 생각이 폭팔해서 그런 글들을 쉴세 없이 써내려 갔을 수 있었을까?


뭐가 그리 할말이 많았을까 싶어 내 역사를 잠시 살펴보니 난 초등학교 때 시인과 바둑기사를 꿈꾸었고, 중학교 때 파티플래너, 성우, 국악고 진학을 원했고, 고등학교때 우연히 들어간 방송반에서 엔지니어에 대한 열망도 잠깐 생겼지만 뜬금없이 미술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미술에 대한 낮은 재능과 그에 걸맞는 낮은 수능성적을 쿨하게 인정하고 현명하게 포기 한 후 재수를 해서 무려 200점을 올려 들어간 대학의 학과는 심리학이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연극학회에 들어가 연기도 하고, 대본도 쓰고, 부대표가 되어 연출을 돕기도 했다. 그리고 바이럴마케팅에 뛰어들어 소위 말하는 '댓글알바'도 해봤고, 미국어학연수에 가서는 힌두교 사원에서 무려 5개월을 살았다. 이렇게 정신없는 삶을 잘도 살아왔구나 생각도 들고 이렇게나 남들과 다른 걸 추구했으니 할말은 정말 많았겠구나 싶기도 하더라.


단순히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 시작했던 독특한 길들이 나에게 차곡차곡 쌓여 있지만 나는 그게 뭔지 알 길이 없어 그 덩어리를 정리하고자 블로그를 시작하려고 한다. 나는 트위터도 하고 있고, 페이스북 뿐만 아니라 싸이월드도 아직 하고 있다. 각자의 목적성이 다 있기에 통합할 생각은 없지만 다 할 수 있을까..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그리고 하고 싶은얘기가 통합이 힘들어 특성 컨셉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진짜 정신산만.. 시간이 갈 수록 지워지는 게시판이 있을것 같다. 일단 시작했으니 난 이제 모르겠다


* 블로그 이름의 의미

'Be good, Do good'은 내가 미국에서 어학연수를 하던 시절 지냈던 힌두교사원에서 배웠던 찬가의 가사 중 일부이다. 

정확히는 'Be good, do good, be kind, be compassionate'

스스로가 좋은 사람이 되고, 올바른 행동과 이타적인 삶을 강조했던 사원생활에 정말 걸맞는 대사이다 싶어 사실 6개월 전에 이 가사를 보자마자 블로그의 이름으로 정해야겠다 생각했다. 어쩌면 제 생각으로만으로 채워지는 욕망표출용 블로그가 아니라, 나름대로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개인적 소망이 투영 된 것 같기도.. 쉽게 말해 이건 내 삶의 모토가 된 짧은 문장이고, 앞으로도 이걸 담고 살고 싶어 블로그 제목으로 정하게 되었다. 힌두교 사원의 이야기는 어학연수 생활 이야기 중 틈틈히 다룰 예정!

posted by 노닝